
솔직히 저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말하는 '신의 사랑'과 실제 역사에서 벌어진 종교 전쟁 사이의 간극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신, 만들어진 위험'을 읽고 나서야 제가 막연히 느꼈던 의구심이 구체적인 질문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책은 종교가 과연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는지, 아니면 분쟁의 씨앗이었는지를 냉철하게 파헤칩니다.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면 이 질문은 피할 수 없습니다.
●종교와 전쟁
신을 믿는 사람들은 신이 사랑과 평화를 강조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전쟁과 불평등의 상당 부분이 종교를 믿는 사람들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아브라함 종교(Abrahamic religions)를 믿는 국가나 민족 간의 갈등이 현재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 종교란 신화상의 족장 아브라함을 공통 조상으로 삼는 세 종교를 의미합니다.
과거 영국의 IRA 분쟁은 가톨릭과 개신교도 간의 갈등이었고, 코소보를 비롯한 발칸 반도의 분쟁 또한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대립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교황 비오 12세는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히틀러의 편에 서기도 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알려진 마틴 루터조차 유대교 예배당과 유대인 학교에 불을 지르는 행위를 옹호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깊은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평화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살인과 박해를 정당화하는 모습이 너무나 모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세례까지 받은 기독교인이지만 우크라이나 공격 명령을 내렸고, 중동 분쟁의 중심에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란 등의 국가는 모두 유일신을 믿는 국가입니다. 마치 신이 전쟁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인간에 의해 창조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복음서 모순
도킨스는 책에서 복음서의 신뢰성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영어에는 '복음서에 있는 진리(Gospel truth)'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복음서는 절대적 진리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19세기와 20세기에 특히 독일 학자들이 연구한 뒤로 이 속담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마태오의 복음서는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인 세금 징수원 마태오가 썼다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어떤 진지한 학자도 복음서들이 목격자에 의해 쓰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네 복음서 중 가장 오래된 마르코의 복음서가 예수가 죽은 지 약 30~40년 후에 쓰였다는 데 동의합니다. 루가의 복음서와 마태오의 복음서는 그 이야기의 대부분을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가져왔고, 일부는 Q(큐)라고 알려진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리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Q란 독일어 Quelle(출처)의 약자로, 마태오와 루가가 공통으로 참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예수의 어록 문서를 의미합니다. 복음서들의 모든 내용은 마침내 문자로 기록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말로 전해지면서 귓속말 놀이(Chinese whispers)의 왜곡과 과장을 겪었습니다. 귓속말 놀이란 여러 사람이 차례로 이야기를 전하면서 내용이 점점 바뀌는 현상을 말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복음서들은 서로 모순됩니다. 예수를 따라다닌 12명의 제자가 있었다는 데는 모든 복음서가 일치하지만, 그들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릅니다. 마태오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다윗 왕의 직계 자손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사이의 조상들은 두 책에서 완전히 다릅니다.
더욱이 예수의 출생지에 관한 이야기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마태오와 루가는 둘 다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 예수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했지만, 그 방법은 서로 달랐습니다. 루가는 로마 황제의 인구 조사를 이용했고, 마태오는 헤로데 왕의 유아 학살을 등장시켰습니다. 요한의 복음서는 예수가 나자렛에서 태어났다고 추정합니다. 이런 모순들을 보면서 저는 성경이 과연 역사에 믿을 만한 길잡이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신론과 도덕성
많은 사람, 특히 미국인은 성경 없이는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하늘의 거대한 감시 카메라 이론'입니다. 신이 지켜보고 있다는 두려움이 사람들을 착하게 만든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2013년 7월에 미국 연방 교도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소속 종교를 조사한 결과는 이 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조사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개신교 그리스도인: 28%
- 가톨릭 그리스도인: 24%
- 이슬람교도: 5%
- 무신론자: 0.07%
유죄 판결을 받은 수감자가 무신론자일 확률보다 그리스도인일 확률이 750배 높습니다. 이 통계는 도덕성이 종교와 무관하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도덕성의 근원이 신의 감시가 아니라 공감 능력과 사회적 학습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신론자도 겁에 질린 가젤이나 굶주린 치타와 그 새끼들을 마음대로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신론자는 신을 믿는 사람과 달리 치타와 가젤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다윈의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Natural Selection)가 그 상황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연 선택이란 환경에 더 잘 적응한 개체가 살아남아 자손을 퍼뜨리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신이 치타를 설계하면서 동시에 치타로부터 잘 도망치는 가젤을 설계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신은 누구 편일까요? 신은 양쪽 모두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겁에 질린 가젤이 필사적으로 도망치다가 치타에게 질식사 당하는 장면을 신이 즐겁게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지 않습니까?
결국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신의 존재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현실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어쩌면 진정 신이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세상에는 과학이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신의 존재를 받아들일 만한 근거는 무엇일까요? 아직도 논란 속에 있는 성경이나 불경이나 쿠란에 적힌 내용으로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더 중요한 질문은 신의 침묵에 대한 것입니다.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전쟁이나 각종 범죄들에 대한 신의 입장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해야 할 것인가? 공동체를 살아가는 모두가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도킨스의 책은 이런 질문에 답하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데 탁월합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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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s://youtu.be/oZDbH71Ihfo?si=7E60FJJd4gsyTcK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