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유전자가 무슨 의지를 가진 존재인가 싶었습니다. 그저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조용히 전달되는 생물학적 정보 정도로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책을 읽으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어쩌면 불편할 정도로 냉정한 구조가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행동, 희생이라고 여기는 선택들이 사실은 유전자의 복제 확률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었다니 말입니다.
●유전자는 왜 개체가 아닌 자기 자신만 남기려 할까
리처드 도킨스는 이 책에서 자연선택의 단위를 개체도 종도 아닌 '유전자'로 규정합니다. 여기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란 환경에 더 잘 적응한 형질이 다음 세대로 전달될 확률이 높아지는 진화의 핵심 메커니즘을 의미합니다. 개체는 죽고 종도 멸종하지만, 유전자는 자기 복사본을 끊임없이 다음 세대로 옮기는 데 성공하는 한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장 놀랐던 건 우리 몸이 유전자의 '운반 수단'에 불과하다는 관점이었습니다. 생물은 유전자가 자신을 보호하고 복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정교한 생존 기계라는 거죠. 처음에는 이 말이 너무 냉정하게 느껴졌는데,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제안으로 받아들이니 오히려 많은 것이 설명되기 시작했습니다.
부모가 새끼를 지키는 행동도 이 틀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유전자의 절반을 공유하기 때문에, 자식을 지키는 행동은 유전자 입장에서 보면 자기 복사본을 보호하는 전략입니다. 혈연선택(kin selection)이라고 불리는 이 원리는 형제자매 사이의 협력, 심지어 개미나 벌처럼 번식을 포기하고 집단을 위해 일하는 사회성 곤충의 행동까지 설명합니다. 혈연선택이란 자기 유전자와 유사한 유전자를 가진 개체를 돕는 행동이 진화적으로 유리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저는 이 개념을 이해하고 나니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많은 장면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미새가 날개를 저는 척하며 포식자를 유인하는 장면, 형제 중 하나가 다른 형제를 둥지 밖으로 밀어내는 장면. 이 모든 것이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유전자 전달 확률이라는 냉정한 계산 위에 있었던 겁니다.
●낯선 존재를 돕는 행동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혈연이 아닌 개체 사이의 협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흡혈박쥐의 사례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줍니다. 이 박쥐들은 사냥에 실패해 굶주린 동료에게 자기 위장의 피를 토해내어 나눠줍니다. 하지만 무작위로 나눠주는 게 아니라 과거에 자신을 도와준 개체에게만 선택적으로 도움을 줍니다.
이것이 바로 호혜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입니다. 호혜적 이타주의란 오늘 상대를 도와주면 미래에 자신이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장기적 교환 관계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오늘은 내가 손해 보지만, 내일은 네가 나를 살릴 수 있다'는 상호부조의 원리입니다. 이 전략이 작동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 같은 상대를 반복해서 만날 가능성이 있어야 합니다
- 누가 협력하고 누가 배신했는지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배신자를 식별하고 처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인간 사회의 신용, 평판, 의리라는 개념들이 결국 이 구조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도덕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반복되는 만남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었을 수도 있다는 거죠.
●배신과 협력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어떤 전략이 살아남을까
그렇다면 배신자는 왜 항상 먼저 이득을 보는 것처럼 보일까요? 단기적으로 보면 배신은 매우 유리한 전략입니다. 상대가 협력할 때 혼자 배신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만남이 반복되는 환경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게임이론(game theory)에서는 이를 '반복된 죄수의 딜레마'로 설명합니다. 게임이론이란 여러 주체가 상호작용하는 상황에서 각자의 최적 전략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학문 분야입니다. 여기서 가장 성공적인 전략으로 밝혀진 것이 '팃포탯(Tit-for-Tat)' 전략입니다. 처음에는 협력하고, 그다음부터는 상대가 한 행동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방식이죠.
저는 이 전략이 흥미로웠던 게, 너무 착하지도 않고 너무 악하지도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먼저 속이지는 않지만 속임을 당하면 즉시 같은 방식으로 되갚습니다. 그래서 항상 협력만 하는 개체처럼 배신자의 먹잇감이 되지도 않고, 항상 배신만 하는 개체처럼 장기적으로 고립되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컴퓨터 시뮬레이션에서도 이 전략이 가장 높은 생존율을 보였다고 합니다.
인간 사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패턴이 나타납니다. 법, 규칙, 처벌 시스템은 모두 배신자를 통제하고 협력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신뢰와 평판이 중요한 이유도, 집단 내에서 누가 협력자이고 누가 배신자인지를 추적하는 시스템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깊은 구조는 집단의 생존을 위한 협력 유지 장치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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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니 인간의 선택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생겼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유전자의 계산 결과라면, 자유의지는 환상에 불과한 걸까요? 하지만 도킨스는 책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기적인 구조 위에서 태어났지만, 그 구조를 이해하고 거스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요. 유전자가 우리를 설계했지만, 우리는 유전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저는 이 말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만드는 사랑과 희생, 도덕은 유전자의 명령을 넘어선 인간만의 선택일 수도 있다는 희망을 남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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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s://youtu.be/up9U_QtnGr8?si=vuzZUsI-3SGBM8QW